호주연합교회와 한인선교에 대해서 2008년에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선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나에게도 두 곳에서 꾸준히 요청이 있었다. 나 자신도 내가 해외로 나가서 선교를 하게 된다면, 당연히 이 두 지역 가운데 한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7년 선교사훈련원에서 훈련을 마치고 다음 임지를 놓고 기도하는 중에 새로운 임지의 후보를 놓고 기도하게 하시는 일이 일어났다. 그 새로운 후보지가 호주였다. 5년에 한 번씩 호주 정부가 실시하는 인구 조사에 의하면, 2021년 호주의 기독교 인구는 호주 전체 인구의 43
나는 어릴 적부터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 낚시터도 다녔고, 혼자 등산도 다녔으며, 혼자 자전거를 타고 서울 근교를 누비고 다녔다. 혼자 다니면 누구 눈치 볼 것도 없고, 내가 가고 싶은대로 마음껏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혼자 다니면서 어려운 것은 갑자기 아플 때였다. 요즘이야 휴대폰이 있어서 산 속에 들어가도 연락을 할 수 있지만, 예전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심하면 아프다고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일찍 하나님 나라로 가는거였다. 호주에서 병원은 방문하고도 후회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이유는 우선, 비싼 진료비를 내
예수님이 가신 길이 부활 승리의 길이긴 하지만 부활에 이르기 전까지의 길은 말 그대로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목회의 길이니 어떤 목회도 쉬울 수는 없다. 그런데 그 목회의 길 가운데 특별히 어려운 길이 이민목회라고 한다. 오죽하면 "말 한마디로 코끼리를 울리기도 하고 성나게도 하는 것이 이민 목회 이야기다." 라는 말이 있을까?호주에 오기 전 한국 최고의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시는 장로님이 계셨다. 부인 권사님도 대학교에서 교수로 계신 분으로 그 위치에 올라가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하셨던
내 인생에 3월 1일은 최소한 세 번의 사건으로 의미가 깊다. 첫 번째 사건은 비록 내가 직접 겪지 못했지만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사건이다.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3.1 독립만세 운동이다. 엄청난 인파가 삼천리 방방곡곡, 거리거리마다 쏟아져 나와 독립을 염원하며 만세를 불렀다. 4월까지 이어진 거대한 물결이었다. 두 번째 사건은 나와 내 아내와의 결혼이다. 나의 모교인 감신대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날도 하객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학교 식당에서 일하시던 ‘이모님들’이 이렇게 하객들이 많이 온 걸 보